“지나가는 배에 구조되리라는 희망을 너무 많이 갖는 것도 그만둬야 했다. 외부의 도움에 의존할 수 없었다. 생존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내 경험상 조난자가 저지르는 최악의 실수는 기대가 너무 크고 행동은 너무 적은 것이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데서 생존은 시작된다. 게으른 희망을 품는 것은 저만치에 있는 삶을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다.”
_얀 마텔, <파이 이야기>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모두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어려움에 봉착한다. 때로는 변화 없이 잔잔한 시기가 펼쳐지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급변하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기도 한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어떻게 해야하는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저 자신을 믿고 묵묵히 나아가야만 하는 때도 있다. 칠흑 같은 밤에 멀리 보이는 등불처럼, 우리 가슴에 그런 희망의 이정표는 하나쯤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그 등불은 ‘저 멀리’ 존재하고 있기에, 우리는 지금 묵묵히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희망을 품는 것은 당연하게도 우리 삶에 많은 에너지를 부여해준다. 빅토르 프랭클의 <삶의 의미를 찾아서>에는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크리스마스 전까지는 집에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던 수용자들이, 그렇지 못할 것이란 사실이 밝혀지며 사망자가 속출하게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이유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생명의 불꽃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필수 불가결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이야기이다.

스트레스가 생기는 근본적인 원인은, ‘등불’은 저기 떨어져 있고, 나는 그곳으로부터 먼 곳에 있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그 사실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 속에 괴로움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던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간극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괴롭다. 하지만 괴롭다고 해서 그 간극이 좁아질까? 어떻게 하면 그 틈을 좁힐 수 있는지 확인하고, 조금씩이라도 걸어서 그곳에 가까워져야 한다. 방법을 모르겠으면, 당장은 그 방법을 찾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상황을 조절할 수 있는 주체가 내 안에 있지 않고 밖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의 요인이 된다. 내 밖에 있는 것을 조절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포기하는 것, 즉 ‘학습된 무기력’이 우울을 유발하는 중요한 원인이라는 것을 많이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지금 상황은 어떻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어떤 게 있는지,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인지 함께 차근차근 점검해보는 것이 나의 일이 되었다. 어둠 속에서도 함께 찬찬히 찾아보면 지금 상황을 좀더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고, 때로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마음 속에 미래에 대한 믿음, 변화에 대한 믿음을 굳게 가진다.

또한, 조금 물러나 생각해보면 그렇게 ‘원하던 상황과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꼭 괴로움과 연결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도 가지게 된다. 불쾌한 것일 수는 있겠지만, 사실은 사실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 뿐일 수도 있는데, ‘이것은 내가 원하던 상황이 아니다’라고 판단해서 스스로 더 괴로워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이 실제의 괴로움에 더해, 우리 마음에서 만들어내는 괴로움인 것이다. 그럴 때에는 그 사실을 함께 깨닫는 작업이 필요하다. 마음 속에 등불 하나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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